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무 대치 (문단 편집) == 결과 == 이후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유방은 관중으로 들어가 병력을 수습했으며, 역양(櫟陽, 약양)에서 주연을 베풀어 주변에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사수 전투에서 죽인 [[사마흔]]의 머리를 전시했다. 그 후 지원군을 이끌고 광무로 귀환하자, 한군은 군세가 크게 불어나 사기가 올랐다. 반면에 항우는 유방이 병력을 지원하는 동안 광무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유방의 부모를 가지고 협박을 일삼거나, 유방과의 일대일 대결로서 모든 것을 결정짓자고 제안하거나, 숨겨둔 쇠뇌를 꺼내 기습적으로 저격을 하거나 등등의 행동에서 항우가 조급해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즉, 당시의 초나라 군대의 상황은 꼼수라도 써야 할 정도로 곤경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팽월은 계속해서 초나라의 후방을 유린하였으며, 제나라의 후손 전횡(田橫)이 제나라 멸망 이후 남은 세력을 이끌고 팽월에게 의지해 팽월과 함께 초나라 북쪽 국경 지대를 계속 위협했다. 항우는 화북 지역을 휩쓸고 있는 한신을 깨뜨리기 위해 용저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보냈으나 오히려 한신은 [[유수 전투]]에서 용저를 물리치며 대승을 거둔다. 결국 한신은 북방 지역을 완전히 장악해버리고 엄청난 세력을 떨친다. 화북 지역을 장악한 한신의 세력은 유방과 항우를 동시에 상대할 수도 있는 거대 세력이었다. 유수전투 이후 항우는 사방에서 압박을 당하기 시작했으며, 어쩔 수 없이 홍구(鴻溝)에서 맺은 조약을 통해 한군과 휴전협정을 맺게 된다. 그러나 양군이 협정 이후 귀환을 시작했을때, [[장량(전한)|장량]]과 [[진평]]의 조언을 들은 유방은 항우의 뒤치기를 시도했고, 이를 항우가 저지하며 [[고릉 전투]]에서 이겼으나 이후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한 [[한신]], [[팽월]], [[영포]] 등 당대의 영웅들이 모두 모여 [[해하 전투]]가 전개되었으며 항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분류:초한쟁패기/전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